전설의 3인방, 세실 비튼 (Cecil Beaton)

시대를 넘어선 아이코닉한 패션의 선구자, 세실 비튼

런던의 새빌로우에 자리한 정통 남성복 맞춤 브랜드, 헌츠맨.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매장 안에는 벽난로와 쇼파 그리고 천장의 흑백 사진들이 가득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실물 사이즈로 출력된 실사 인스톨레이션까지! 흑백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한 시대를 풍미한 포토그래퍼이자 소셜라이트 세실 비튼이다! 이곳에는 사진가로는 최초로 영국 황실 작위를 받은 비튼 경의 사진 속 유명한 인사들의 모습은 하나도 볼 수 없다. 내셔널 갤러리는 물론 전세계 주요 갤러리와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사진 속에는 1920년대부터 80년대 그가 죽기까지 피사체로 섰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등 황실 패밀리는 물론 오드리 헵번과 그레타 가르보를 비롯한 헐리우드 스타들, 그리고 앤디 워홀과 피카소 등 아트와 문화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명단이 등장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사진 속 주인공들이 아닌 그를 추억하는 특별한 자리다. 훤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세실 비튼의 패션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철학을 기록한 책 <A Life in Fashion, The Wardrobe of Cecil Beaton> 의 출판을 축하하는 행사를 한바탕 치른 후 저자인 벤자민 와일드와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패션 역사가이자 교수인 벤자민 박사와의 대화를 토대로 세실 비튼 경의 ‘패셔너블한 삶’에 대한 가상 대화를 실현해봤다. 연극 무대를 탐미하며 시도한 그의 과감함 패션은 물론 에드워디안 룩을 고수한 클래식한 스타일까지. 선구자적인 열정을 지닌 그는 자신의 패션 여정을 모두 기록하고 소통하며 흔적을 남겼고, 벤자민 박사는 책을 통해 그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풀어나간다.  <데이즈드>가 20세기초에 태어나 아이코닉한 삶을 살아간 비튼 경의 변화 무쌍한 삶과 패션의 이야기를 살짝 공개한다.

Dazed & Confused: 사진가로서 당신의 커리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드리 헵번 등 헐리웃 배우들을 촬영한 당신의 흑백 사진들이 유명한데, 어떻게 사진가가 된 것인가?
Cecil Beaton: <마이 페어 레이디> 촬영 당시는 내 커리어의 화룡점정 같은 시기였지만, 이미 그 전에 정보부를 위해 전쟁 사진가로 많은 사진 작업을 해왔다. 

Dazed & Confused: 정보부를 위해 무슨 사진을 찍은건가?
Cecil Beaton: 전세계를 다니며 대영제국을 위해 전쟁터에 나선 군인들의 현장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폭격 맞은 런던의 모습이라든지 아프리카 사막의 사진 등 아이코닉한 전쟁 사진들이다.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고요한 영국에서 자란 우리 세대에게 2차 세계 대전은 예전에는 알지 못했고 익숙치 않은 고통을 목격하게 했고 그 감정에 노출되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Dazed & Confused: 젊은 시절 얘기를 좀 듣고 싶다. 1904년생인 당신의 20대는 어땠나?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시절 당신의 남다른 패션에 대한 얘기가 종종 회자되던데.
Cecil Beaton: 난 좀 독특한 패션을 서슴지 않고 시도했다. 남들과 다르고 싶었고, 특히 무대 의상에 관심이 많았다. 연극 속에 연출된 의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많이 들어와 직접 드레스를 입어보거나 팬시 드레스 또는 코스튬으로 드레스업도 했다.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조명을 받는 느낌은 무척 특별하다. 드레스업한 순간들을 사진과 다이어리로 기록하기 위해 혼자 집에서 카메라로 촬영하곤 했다.

Dazed & Confused: 그 유명한 레빗 코트도 드레스업의 일종인가? 크림 코듀로이 위에 장식된 핑크 머슬린 소재의 꽃 디테일과 초록 잎의 조화는 물론 토끼 마스크까지! 전시된 코트와 착용한 당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순간 뇌리에 박히더라.
Cecil Beaton: 그건 30년대 말이니까 좀 더 이후인데, 윌트셔 지역에 있는 컨트리 홈에서 몇몇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시간에 입은 기록이다. 그때 우린 이미 헐리우드를 자주 오가며 일하던 때이고, 화려한 무대 의상이 전혀 튀지 않는 그곳 생활을 통해 좀 더 과감하고 대담한 옷들을 즐겨 입게 되었다. 

Dazed & Confused: 친구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입은 룩을 촬영했단 말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온라인에 자신들의 데일리 룩을 올리는걸 즐기는데, 일종의 기록을 남기는건가?
Cecil Beaton: 대부분 셀프 포트릿으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1920년대에서 30년대까지는 나의 패션 스타일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아티스트나 귀족들이 모이는 소셜 서클 안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을 남기는 스크랩 북이나 사진 앨범을 꾸준히 관리하는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모두가 여기에 푹 빠져있다. 게다가 <더 스피어> 같은 잡지 기자들도 우리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을 포함해 나도 모두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Dazed & Confused: 당신은 훤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갖췄다. 화려한 패션 워드로브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재력을 물려받기라도 했는지 물어도 되나?
Cecil Beaton: 스크랩북에 대한 열정은 일종의 자기 과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낮은 자존감에 의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집안 대대로 목재 사업을 하는 가업이 있지만,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미국 <보그>와 계약한 후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뉴욕을 자주 오가며 미국과 영국의 패션 간극이 크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내가 패션에 많은 돈을 쓰기라도 하듯 말하지만, 홍콩에서 맞춤 제작한 옷들도 많고 전세계를 여행다니며 옷을 구입한다.

Dazed & Confused: 기본적으로 당신에게는 영국 신사의 깔끔한 이미지가 있다. 새빌로우 테일러링도 많이 입는다고 들었는데?
Cecil Beaton: 클래식 룩은 에드워디안이 정석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의상 디자인을 맡으며 남자 주인공의 의상을 준비할때 나의 에드워디안 워드로브를 그대로 재현했다. 내가 입었을때는 주로 포트릿으로 보던 룩이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을 통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는건 무척 설레는 작업이었다.

Dazed & Confused: 에드워디안 룩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면?
Cecil Beaton: 스리피스 수트여야 하고, 트위드같이 텍스쳐가 느껴지는 소재를 레이어링하거나 컬러감이 있는 소재를 믹스하는 룩을 좋아한다. 1960년대에 유행한 진 스타일이나 트레이너 운동화 룩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 들어 투피스 수트 안에 티셔츠를 입고 야구 신발을 신는 시도는 즐기지만 이브닝 웨어는 절대 믹스해서는 안된다. 포멀한 자리에는 더블 브레스티드 스리피스 수트의 블랙 타이 룩이 제격이다. 특별한 룩을 입어야 하는 자리라면 격식을 따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 나의 런던 자택에서 내가 호스트한 티 파티에 참석한 돌아가신 엘리자베스 여왕 모후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어머니)는 우아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격식은 물론 품위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그녀는 완벽했다. 그런 인물을 만나는 일은 무척 드물다.

Dazed & Confused: 영국 황실 얘기를 하니 1973년에 작고한 윈저 공작과 미망인 심슨 여사가 떠오른다. 심슨 부인과는 친한 사이이지 않나?
Cecil Beaton: 윈저 공작과 월리스 심슨의 1937년 결혼식 사진도 내가 촬영했으니 두터운 친분이 있다. 이후에도 심슨 부인의 포트레이트 촬영을 여러 차례 작업했고, 패션에 대한 열정도 나누며 친분을 이어갔다. 윈저 공작의 마지막 옷장 속에 53벌의 수트가 있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는데 나도 50년대와 60년대 사이에 패션 전성기 시절에는 그 정도 있었을 것 같다. 그때부터 하나씩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V&A에 기증하기 시작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30년대에 구입한 수트를 50년대에 입고 셀프 포트레이트를 촬영한 적도 있고, 특히 20대의 구입한 수트는 50대 들어 입으니 독특하고 휘귀해서 차별화하기 좋아 즐겨 입었다. 그러고보니 다양한 시대를 지나며 변화한 바지 실루엣의 역사가 떠오른다. 나에게는 트렌드와 상관 없이 완벽한 바지 통과 허리에서 부터 아래로 흐르는 원단의 재단에 대해 길링험 (영국 도셋 지역의 도시)에 있는 나의 테일러와 많은 대화를 통해 조율한 즐거운 추억도 있다. 새빌로우 테일러링 브랜드들은 저마다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이랍시고 그걸 강요하는데 안감이나 버튼 등이 내 취향과는 달라 불만이다.  

Dazed & Confused: 당신에게 아이코닉한 패션 모멘트로 기억되는 추억도 있나?
Cecil Beaton: 아무래도 래빗 코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고,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며 1930년대에 심취한 밀리터리 룩을 꼽고 싶다. 오스트리아 테일러들의 작업으로 완성된 밀리터리 재킷이 당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귀족들 사이에서 대 히트를 쳐 유행했다.

Dazed & Confused: 에드워디안 클래식을 고수하는 당신이지만 동시에 속에 잠재된 그 대담한 패션 감각의 원천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건지 궁금하다.
Cecil Beaton: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의 디렉터였고 V&A의 디렉터이던 로이 스트롱 경도 오렌지와 블루로 매칭한 화려한 (Flamboyant) 수트에 거대한 타이를 매곤 했다. 그는 물론 나의 친구였고 우리는 화려한 패션을 즐겼다. 1960년대에 남자들이 모두 좀 더 모던하고 현대화된 수트를 입고 싶어할때 난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를 아이콘이라고 부르고 나의  패션 속도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이들에게 보란듯이 내가 가장 애정을 느끼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표현했다. 그랬더니 당시 많은 이들이 나를 뒤따르더라. 최근 들어서는 나의 패션을 ‘빈티지 보그’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수트에 전통적이지 않은 슈즈나 페브릭을 사용한 레이어링이나 밝은 톤의 컬러를 선택한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 페도라나 테가 넓은 스테트슨 모자를 많이 쓰기 시작했다. 모자를 독특한 소재로 주문 제작하기도 한다.

Dazed & Confused: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떠난 뒤 우리는 당신의 패션을 어떻게 기억할까?
Cecil Beaton: 글쎄, 우리의 처음 대화가 그랬듯 누구는 내가 촬영한 흑백 인물 사진들로 날 기억할 것 같다. 미국 <보그> 커버나 화보 등의 사진들도 이미 전시를 통해 많이 알려진 탓에 그것도 나에 대한 추억이 될 것이다. 이미 살아 생전에도 다이어리 3권을 모두 출판했으니 미출판 작품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패션에 대한 나의 남다른 열정과 애정도 한 몫하겠지만, 일일이 셀프 포트릿으로 촬영하고 기록한 내용은 물론 수벌의 옷을 뉴욕과 런던 박물관에 기증했으니 패션계는 나를 더 많이 회고할 것이다. 새빌로우 브랜드 리처드 제임스 같은 하우스가 1920년대의 래빗 코트를 영감으로 한 컬렉션을 발표하고, 패션쇼의 무드를 이끌어갈 스타일리스트 케이티 그랜드가 런던 디자이너 자일스 디컨의 쇼에 내 <보그> 화보 촬영 느낌을 완벽하게 메탈릭 페브릭으로 재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빈티지 오트쿠튀르 전문가인 윌리엄 뱅크스 블레이니가 내 워드로브의 가치를 패션계에 널리 전파할 것이다. 이미 소더비를 통해 나의 모든 포트레이트, <보그>와 작업한 사진 및 필름에 대한 경매를 일임했으니 내 이름과 유산은 세상 속에 당분간 머물러 있을 것이다. 

글/ 여인해

이 글은 <Dazed & Confused> 코리아의 2016년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