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D CRANE 셀프리지 백화점의 여성복 바잉 디렉터 저드 크레인

최고라는 수식에 걸맞는 어마한 규모와 알찬 구성으로 영국과 글로벌 고객을 사로잡는 런던의 셀프리지 백화점! 셀프리지 백화점을 이끄는 주역들은 백화점 안에 예상을 뒤엎는 흥미진진한 제품을 진열하기 위해 미지의 패션 도시 나이제리아의 라고스 (Lagos)까지 날아가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셀프리지 백화점의 핵, 여성복 바잉 팀을 이끄는 디렉터 저드 크레인 (Judd Crane)으로부터 셀프리지 백화점의 신인 디자이너 발굴 및 양육에 대한 포부를 들어봤다.

백화점 정식 오픈 시간을 30분 앞 둔 오전 9시. 노랑색 셀프리지 이름표를 단 수 백명의 직원들이 냄비 뚜껑과 냄비를 이용해 조형한 아슬아슬한 킬힐 조각상은 의식하지도 않고, 이어지는 직원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오전 9시 출근 시간과 함께 셀프리지 백화점 전체에 걸쳐 정상 가동이 시작되고 직원들도 고객 맞이에 분주하다. 셀프리지의 출근 인파에 묻혀 백화점의 직원 출입구를 통과한 <보그 코리아> 팀은 여성복 바잉 팀 디렉터 저드 크레인을 만나러 왔다.

특정 인물의 인터뷰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백화점의 방침 때문에 이번 인터뷰와 촬영은 최고 윗선의 승인을 기다리는 과정이 따랐다. 힘겹게 떨어진 오케이 사인으로 드디어 셀프리지 팀의 사무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가장 안 쪽에 도달하니 유리 문으로 굳게 닫힌 저드의 사무실이 나왔다. “백화점 안을 구성하는 그 진행 과정을 설명해줄께요.” 사무실 안에 마련된 회의 테이블에 저드와 마주 앉았는데, 준비한 질문을 채 묻기도 전에 그가 나서서 백화점의 운영 방식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하나의 디테일이라도 놓칠새라 재빨리 녹음기를 꺼내 들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먼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요. 새로운 프로젝트를 앞두고 상업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의 컨셉을 놓고 브레인스토밍하죠. 여러 팀들이 모여 소통을 시작하는 거예요.” 백화점 플로어에는 이제 막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이 당도하고 있는데 저드의 뒤로는 2014년 봄/여름 컬렉션에 대한 무드 보드가 마련되어 있다. 전 시즌과 다음 시즌을 오가며 컬렉션을 살피는 그 사이 사이에 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소통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모양이다. “셀프리지 백화점에는 크리에이티브, 바잉, 머천다이징, 윈도우, 리서치 등 여려 개의 팀이 있는데 프로젝트를 위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요.”

저드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막 런칭한 BYT (Bright Young Things, 2011년부터 시작된 신인 디자이너 육성 프로젝트) 2013으로 이어졌다. 이틀 전에 쇼윈도우 팀과 디자이너들이 협력해서 만든 윈도우 디스플레이가 공개되고, 몇 개월간에 걸쳐 멘토와 디자이너가 논의해 완성된 결과물이 매장에 배달되고 행거에 걸린 상태다. 마침 촬영을 위해 미리 살펴본 팝업 숍 (백화점 1층 원더룸 이라는 럭셔리 섹션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은 제품에 태그를 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프로젝트마다 전체 팀이 모여 첫 단계부터 밟아 나가는데, BYT 2013프로젝트의 경우 크리에이티브 팀이 준비한 100명도 넘는 디자이너 리스트에서부터 시작했어요.” 크리에이티브 팀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라나 웨스턴 (Alannah Weston, 셀프리지 백화점 오너의 딸) 의 직속 부서로 일년 내내 (혹은 그 이상) 현장을 뛰며 (팀장인 에마는 DJ도 겸한다) 보고 듣고 리서치한 따끈 따끈한 자료를 전체 팀에게 풀고, 각 팀은  필터링 작업에 돌입한다. BYT 의 리스트에는 제품을 팔아본 경험이 없는 완전 신인 디자이너가 대거 포함되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현장에서 활동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분야의 이름들도 투입되었다. 학교 졸업 작품전에 의존하는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셀프리지 백화점의 신인 육성 프로젝는 다양한 크리에이티브 군을 두루두루 관찰하고 연구한다 (이번 시즌에는 여성복, 남성복, 액세서리, 아트 & 디자인, 음식 등에서 선출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컬렉션이 진정 대담한 (truly bold) 가예요. 그리고 나서는 디자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또 판매는 가능한지 등을 고려하죠.” 최종 선정을 위해 저드와 팀원들은 각 디자인에 대한 심층 분석에 들어가고 선택의 기로에서 아주 미세한 간극이 결정의 기준이 된다. 시작부터 결정까지 프로젝트는 모든 팀 간의 의견 조율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많은 대화가 오가고 여러 차례의 회의가 따르기도 한다. “이번 경우에는 15명으로 의견이 좁혀졌고, 그게 최종 결정된 숫자예요.”

왠만한 영화제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과정이다. 선정에 가담하는 심사위원단은 셀프리지 현장에서 직접 뛰는 주요 인력들, 후보자 명단이 정보팀에서 1차 선출되고, 이어지는 2차, 3차 심사를 거쳐 최종 수상자 15명 드디어 결정! 셀프리지 백화점 안을 어떤 구성으로 채울 때 늘 이렇게 대단한 진행 과정을 거치는 걸까? “우린 우리가 하는 일에 무척 진지해요. 그래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열정을 들여 제품군을 구성하고 그것을 위한 하나의 환경을 조성하죠.” 저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드 팀이 이끄는 여성복 층이 떠오른다. 셀프리지의 여성복 플로어는 실제로 다른 백화점과 구성이 좀 다르다. 어디서부터가 백화점 직영 공간이고, 어디가 브랜드가 운영하는 대여 공간 (일명 컨세션) 인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직접 사입한 디자이너 컬렉션을 행어에 걸어 진열하고 브랜드의 제품군은 인테리어를 갖춘 매장 형태 안에 구성되기 마련인데 셀프리지는 하나의 통일된 환경으로 고객들을 맞는다. 저드는 이것이 여성복 뿐 아니라 남성복에도 적용되는 ‘갤러리 시리즈’의 구성이라고 한다. 갤러리마다 다른 독특한 체험이 제공되고, 독특한 감정이 전달되어 서로 취향이 다른 고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 키 포인트는 각 공간마다 셀프리지 팀의 손길을 거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브랜드가 직영하는 톰 포드 매장에는 저드가 지난 시즌의 최고 황홀한 룩으로 꼽는 ‘목에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갈기를 표현한 털이 달린 얼룩말 무늬 비즈 드레스’ 가 마네킨에 입혀져 숍 앞에 진열되어 있다. 셀프리지는 쇼 피스를 사는데 주저함이 없다. 왜냐면 매번 이 룩들은 판매되니까! 이 쇼를 본 것도 저드였고, 이 쇼 피스에 대한 바잉 결정도 그가 직접 내렸다. 톰 포드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피터 필로토의 컬렉션이 보이는데 백 드롭으로 이 듀오 디자이너가 플로랑스에 매 계절 열리는 피티 (Pitti) 박람회에서 선보인 후 아카이브에 묻혀 있던 패션 필름이 벽에  투사되어 상영 중이다. 저드 팀이 듀오 디자이너와 얘기하다 패션 필름의 존재를 알고 밀어 붙인 결과다. 조금 더 가면 에르뎀이 저드에게 난데 없이 피아노 예찬을 늘여놓는 바람에 에르뎀의 프린트 장식을 입고 백화점 안에 디스플레이하게 된 피아노와 의자 세트를 볼 수 있다. 물론 피아노 옆에는 에르뎀의 2013 가을/겨울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다. “작년부터 셀프리지는 백화점 차원에서 영국 디자이너들의 전체 컬렉션을 사겠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디자이너마다 전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죠.” 저드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영국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일부만 바잉하는 영국 리테일러들의 현실 속에서 셀프리지는 전 컬렉션 바잉을 통해 영국 디자이너를 지지하겠다는 의식 있는 결정을 내렸다. 디자이너들을 브랜드로서 각인시키고 그들의 이야기를 고객에게 소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다음 단계다. 이미 전체 컬렉션을 바잉하기 전부터 예외 없이 영국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은 완판에 가까운 좋은 매출 실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고객들의 보이지 않는 지지의 힘에서 비롯된 결과.

지금은 발렌티노가 들어서 있지만, 이전에 또 다른 프로젝트 공간이었던 에스컬레이터 옆  ‘갤러리’에 대한 일화는 듣기만해도 흥분된다. “브루노 (Bruno, 이번 인터뷰를 성사시킨 인터내셔널 PR 매니저)의 제안으로 나이제리아 라고스 패션 위크를 갔어요. 우리 팀 디자이너 바잉 매니저 보사 (Bossa)가 함께 가서 나이제리아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바잉해왔죠.” 고객들은 열광했고, 컬렉션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 프로젝트는 백화점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오는데 성공한 케이스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일년에 한번, 10월말에 열리는 라고스 패션 위크는 올해도 다시 참석할 예정이다.

백화점 안에 이런 예기치 못한 놀라운 요소들을 가져와야겠다는 영감은 다름 아닌 아시아의 백화점을 통해 얻었다. “아시아의 일반적인 컬렉션 전개 방식은 절충적 (eclectic)이예요. 전세계를 통틀어 (아시아를 제외하고)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일반적으로 예측 가능하기 마련인데 아시아 시장은 이런 특성에 기인해 곳곳에 놀라운 요소들이 묻어나고 그것이 우리에게 큰 영감이 되었어요.” 개성을 평준화시킨다고 생각한 바로 그 절충적인 우리의 성향은 저드의 눈에 다르게 와 닿았다. 유럽에서는 어두운 느낌의 아방가르드한 디자이너로 통하는 릭 오웬즈나 기하학적이고 난해한 요소가 다분한 마르틴 마르지엘라가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실이 새삼 (릭 오웬즈의 커머셜 디렉터가 직접 주드에게 한국이 그들에게 가장 큰 시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놀랍다. “릭 오웬즈, 가레스 퓨, 꼼 데 가르송은 물론 마르지엘라가 우아한 룩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마르지엘라가 칵테일 파티를 위한 룩이 되다니요!” 저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울 패션 위크도 조만간 방문하고 싶고 한국 컬렉션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덧붙이는 저드. 다음 시즌에는 한국 디자이너의 제품을 셀프리지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홍콩 그룹 IT 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고객들에게 아시아의 하이 스트릿에서 일어나는 일을 노출시키는 재밌는 프로젝트예요. 서울과 도쿄에서 일어나는 스트릿 패션 룩을 가져오는 거죠. 한국, 중국, 홍콩, 일본 고객들, 그 중에서도 특히 패션 고객들은 굉장한 지식인들이예요. 패션은 모든 곳에 만연해 있고, 그들의 패션을 향한 창의적인 관심은 무척 흥미로워요.”  저드는 이 현상을 셀프리지 고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그렇게 성사된 이번 프로젝트는 홍콩에서 날라온 IT 그룹의 7개 하이 스트릿  브랜드가 1층 팝업 공간으로 할애된 모든 장소에 (통상 한 프로젝트에 2-3개 공간을 내주는 전례를 깨고) 2달간 들어서는 기대되는 작업이다.

아시아 시장에 대한 유럽의 관심이 날로 뜨거워지는 동안 런던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러움과 시셈 이 섞여 있다. 런던을 현재 최고 핫한 도시로 꼽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런던 신인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던 과감한 디자인과 실험성은 과연 사라진걸까? “상업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가 바뀌었어요. 지금 런던의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실험적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데 15년전 갈리아노나 맥퀸의 컬렉션을 오늘 본다면 지금도 그것이 실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우린 훨씬 더 파격적인 것을 실험적이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저드의 이야기에 일리가 있다. “생각나요? 프린트가 지금의 위치에 이르기 전에 사람들은 피터 필로토와 마리 카트란주로 대변되는 그 세대 디자이너들을 보고 컴퓨터로 디자인한 디지털 프린트로 전 컬렉션을 장식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흥분했어요!” 저드가 얘기하는 이 에피소드는 불과 몇년 전의 일이다. 아시아 바이어들만 프린트 드레스 앞에 손사래를 친게 아니다. 전세계가 이것이 과연 성공할 트렌드인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연히 결과는 성공! 이 디자이너 그룹은 런던을 대표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고, 프린트는 크고 작은 브랜드의 주요 라인으로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다시 신인 디자이너 육성 프로젝트인 BYT이야기로 돌아가보자. 2011년 시작 당시부터 컬렉션의 전개를 꾸준히 주시했다. 처음에는 2층 여성복 매장 안에 작은 공간 안에 시작되었고, 다음 해에는 슈즈 디자이너 케이 카가미 (Kei Kagami)의 라인이 도버 스트릿 마켓에 이어 BYT 에 포함되어 블로거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처음, 셀프리지의 후원 범위는 쇼 윈도우를 내주고 제품을 사입하는 것이었다. “제품들이 다 잘 팔렸어요. 완판되어 추가 주문에 들어가기도 했죠. 가장 뿌듯한 케이스는 시몬 로샤 (Simone Rocha)의 성장이예요. 이번 시즌부터 셀프리지에서 브랜드로 판매하기 시작할 거예요.” 저드는 도버 스트릿 마켓의 전세계 독점권이 이제서야 풀려 백화점으로는 처음 셀프리지가 단독 판매권을 갖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레이스로 장식된 시몬의 아름다운 컬렉션을 처음 상품으로 선보인 곳이 셀프리지의  BYT 프로젝트다.

신인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것이 첫 단계라면, 디자이너들의 성장을 위한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디자이너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무척 영리하게 앞서나가야 해요. 예를 들어 시몬과 마리 카트란주의 경우 프리 컬렉션을 선보이지 않는데, 큰 브랜드들이 프리 컬렉션을 배송하는 시점에 벌써 본 컬렉션의 제작을 완성해 매장에 선보여요.” 저드는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길수록 디자이너도 리테일러도 유리한데, 이 논리를 놀랍게도 시몬과 마리는 일찌감치 파악한 것 같다며 성공적인 디자이너의 표본으로 꼽았다. “이런 머천다이징 흐름에 대한 기본 상식을 빨리 깨닫는 디자이너는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어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디자이너들에게 상업적인 요구를 따르는 일은 무척 중요한 과제다. 신인 디자이너에게  놀랍고 획기적인 디자인 재능은 물론 필수적이다. 셀프리지는 BYT라는 플랫폼을 통해 이 신인들에게 필요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발전과 성장의 몫은 디자이너 본인에게 달려 있는 셈! 신인들을 위한 BYT 프로젝트, 전세계 다양한 신상을 소개하는 팝 업 프로젝트, 또 그 어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도 결국에는 셀프리지 백화점과 디자이너들의 비전이 만나고 열정이 타오를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저드 크레인이 이끄는 셀프리지 백화점의 여성복 바잉 팀은 벌써 2015년 달력을 내다보며 백화점 안에 어떤 놀라운 일들이 펼질지, 또 어떤 디자이너들이 그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날개를 달고 성장을 거듭할지 논의에 들어간 상태다! 다음 BYT 프로젝트는 2015년 상반기로 예정되어 있다.   

글/ 여인해
사진/ 서원기

이 글은 <VOGUE> 코리아 2013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