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volution of London, The Fashion Incubator 패션 인큐베이터, 런던의 진화

지난 9월로 25주년을 맞은 런던 패션 위크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패션 역사에 25년이라는 한 획을 긋고, 이를 대대적으로 축하한 런던은 이제 변화를 모색중이다. 더 이상 신진 디자이너들을 키워 남 좋은 일만 하지 않겠다는, 대신 디자이너 브랜드의 육성과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지난 25년간 런던 패션 위크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백스테이지에서 알렉 웩, 케이트 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제이드 재거 (맨 오르쪽, 1998 S/S Mathew Williamson) 사진/ Press Association Images

백스테이지에서 알렉 웩, 케이트 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제이드 재거 (맨 오르쪽, 1998 S/S Mathew Williamson)
사진/ Press Association Images

 8인치 플랫폼을 신고 런웨이에서 엉덩방이를 찧었던 나오미 캠벨과 펑크의 여왕 비비안 웨스트우드 (1993 F/W) 사진/ Press Association Images

8인치 플랫폼을 신고 런웨이에서 엉덩방이를 찧었던 나오미 캠벨과 펑크의 여왕 비비안 웨스트우드 (1993 F/W)
사진/ Press Association Images

갑자기 난데 없이 25주년 축하 행사가 왠말인가 싶을지 모르겠다. 다른 패션 위크들과 비교하자면 25년이 그리 긴 기간도 아닌데... 패션 위크라는 개념도 사실은 디자이너들의 쇼를 모아주는 외형적인 틀에 불과하다. 중요한건 그 안에 어떤 알짜배기 요소들이 담겨 있느냐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시즌, 런던은 도시 전체가 하나가 되어 25주년을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무엇을 축하한것인가?  

런던과 함께 4대 패션 위크라 불리우는 뉴욕, 밀라노, 파리를 생각해보자.  넷 중 런던의 실적이 가장 미비하다. 각 도시가 저마다의 특색과 재능을 살려 세계 패션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지금, 런던 디자이너들의 세는 약하디 약하다. 런던을 대표하는 빅 브랜드는 대부분 다른 도시에서 캣워크 쇼를 선보이고 있고, 런던은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인큐베이터 이미지로 굳혀진지 오래이다. 그나마도, 발굴되어 성장하는가 싶으면 빅 브랜드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가면서 디자이너의 브랜드는 조용히 사라진다. 런던 패션 위크를 지키고 있는 굵직한 브랜드는 폴 스미스와 멀버리 정도이다. 

물론 축하할 요소들이야 다분히 많다. 영국 패션 협회가 25주년 행사 개요를 발표하자마자 하루가 멀다하고, 돌아오겠다는 브랜드들이 속출하더니 지난 몇년간 볼 수 없었던 알차고 꽉찬 스케줄이 완성되었다. 덕분에 모양새와 구색이 제법 잘 갖춰진 축제가 완성되었다. 버버리가 포르섬 라인을 다시 가져왔고,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의 니트웨어 퍼레이드가 이어졌으며, 안토니오 베르라디, 클레멘츠 리베이로, 조나단 선더스, 자스민 드 마일로, 매튜 윌리엄슨까지 쟁쟁한 리스트가 귀환, 복귀했다. 아 그리고, 런던과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뉴욕 출신의 제레미 스콧도 대열에 합류했다. 화려한 리스트는 계속해서 세계가 주목하는 크리스토퍼 케인, 마리오 슈왑, 에르뎀, 피터 필로토 등의 신진 디자이너 계보로 이어졌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총리 관저인 10 다우닝 가에서의 만찬! 디자이너들과 저널리스트, 바이어, 패션 스카웃 등 런던 패션 위크의 주역들이 고든 & 사라 브라운 총리 부부와 함께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말하자면, 영국의 백악관 혹은 청와대가 패션계 인사들에게 앞으로 더 잘 부탁한다는 인사로 식사를 대접한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이번 시즌 합류한 디자이너들이 과연 다음 시즌에도 남아있을지 불확실한 가운데 런던 패션 위크의 열기는 달아오를때로 올랐다. 런던 패션 위크가 전환점에 이른 것이다. 애초부터 영국 패션 협회의 바람은 방향 전환이었을 것이다. 

 

25 YEARS OF LONDON FASHION WEEK

2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초대 런던 패션 위크는 아주 간소했다. 그나마 존재한 디자이너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British Designer Show/London Designer Collections), 캣워크 쇼보다는 살롱 쇼나 쇼룸 전시 위주로 컬렉션을 선보였다. 지금의 런던 패션 위크 형태로 이벤트화된 것은 1983년 영국 패션 협회가 구성된 이후의 일이다. 협회는 중구남방으로 흩어진 쇼와 나뉘어진 디자이너 그룹을 모으고, 영국 패션 어워즈와 각종 이벤트들을 구성하였지만 – 故 다이애나비가 바이어와 프레스들을 위해 만찬을 여는가 하면,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직접 텐트를 순회하기도 했다 -  그때도 지금 같이 방문객이 적네, 바잉이 이루어지지 않네 말 많고 탈 많은 패션 위크였다.  그뿐이 아니다.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은 당시도 파리나 밀라노에서 쇼를 선보이고 있었다. 

런던의 패션 트렌드를 만들고, 이끌어가야 할 디자이너들의 세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레이디 비비안 웨스트우드 (그녀에게는 Dame이라는 작호가 주어졌으니 예를 갖춰야 한다)는 그녀의 히트작이 될 ‘해적 (Pirate)’ 컬렉션을 들고 당시 런던 패션 위크 텐트인 올림피아에서 쇼를 열었다. 그녀의 첫번째 캣워크 쇼였다.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쇼는 뉴 로맨티시즘의 시대를 연 중요한 이벤트로 기록된다. 그러나, 웨스트우드는 이듬해인 1982년 파리로 쇼를 옮겨갔다. 

그래도 런던에게는 존 갈리아노가 있었다. 런던의 편집 매장 브라운즈의 유명한 일화가 된 쇼윈도우 사건은 1984년의 이야기다. 갈리아노는 센트럴 세인 마틴의 졸업 작품쇼로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레젠크와야블 (Les Incroyables)’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브라운즈의 B여사는 전 컬렉션을 구입하고, 브라운 매장의 메인 쇼윈도우를 그에게 바쳤다. 이후 갈리아노는 런던에서 계속 컬렉션을 선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후원사와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그는 그해 10월 쇼를 건너뛰어야 했다. 침체기에 빠진 갈리아노를 위해 나선건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새로운 자금을 확보한 갈리아노는 이듬해 런던이 아닌 파리 오뜨 꾸띄르 쇼에 섰다. 15일만에 17벌을 완성해낸 갈리아노의 옷을 입고 케이트 모스, 헬레나 크리스텐센, 나오미 켐벨 그리고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캣워크를 걸어내려갔으며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갈리아노의 시그니쳐 룩의 시작이다. 갈리아노의 쇼에 섰던 당대 최고의 슈퍼 모델 군단은 그를 돕기 위해 모델료를 한푼도 받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한편, 런던 패션 위크는 1993년 뉴제네레이션 스폰서쉽을 런칭했다. 떠나간 디자이너들에게 연연하지말고 런던 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후원 프로그램이었다. 뉴제네레이션 상을 받은 디자이너들에게는 쇼룸 전시 혹은 캣워크 쇼가 100% 후원되었고 그 첫 수상자 명단에 포함된 이름이 알렉샌더 맥퀸이다. 

알려진대로 맥퀸은 16세에 학교를 떠난 이후 사빌로우에서 테일러링을 전수받았고, 이후 밀라노로 건너가 로미오 질리의 디자인 어시스턴트로도 활동한다. 1994년 런던으로 돌아온 맥퀸은  루이즈 윌슨 (Louise Wilson) 디렉터 휘하에서 센트럴 세인트 마티 스쿨의 MA 과정을 마친다.  루이즈 교수가 배출한 인재는 소피아 코코살라키 (전 비오네 (Vionnet) 크레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선더스, 자일즈, 루엘라, 크리스토퍼 케인 등으로 이어진다. 1994년 맥퀸의 MA쇼를 본 당시 스타일리스트 故 이사벨라 블로우가 전 컬렉션을 구입하였고(사실 한번에 산게 아니라 한달에 한벌씩 그렇게 계속 사나갔다고 한다), 맥퀸은 극적이고 파격적인 컬렉션으로 런던 패션 위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는다. 

한해 앞서 1993년, 레이디 웨스트우드의 쇼가 런던에 잠시 귀환했다.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나오미 켐벨의 유명한 넘어지는 사건이 일어날 찰나이다. 레이디 웨스트우드는 새로운 라인, 앙글로마니아 (Anglomania)의 런칭 무대로 런던을 선택했다. 훗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상징이 될 타탄 체크를 입고 높디 높은 굽을 신은 나오미는 발을 삐긋하며 엉덩방아를 찧는데, 당혹한 이 순간 나오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날렸다. 울어도 부족할 판에 터져나온 그녀의 웃음은 아찔한 사고를 단번에 최고의 에피소드로 등극시켰다. 당시 영국이 낳은 모델 나오미 캠벨은 프랑스와 영국 보그의 커버를 장식한 첫 흑인 모델(1988) 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슈퍼 모델 1세대의 화려한 전성기 가운데 있었다. 레이디 웨스트우드는 앙글로마니아 컬렉션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타탄 체크에 ‘맥안드레아즈 (McAndreas)’라는 가호를 부치고, 이 패턴은 스코틀랜드의 직조사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타탄 체크는 스코틀랜드의 여러 가문을 상징하는 독특한 패턴으로, 보통 새로운 타탄이 인정받기까지는 200년이 걸린다고 하니, 비비안 웨스트우드 정말 대단하다. 

1993년은 후세인 샬라얀이 등장하는 해이기도 했다. 그의 센트럴 세인 마튼 졸업 컬렉션이 갈라아노에 이어 브라운즈 매장의 쇼윈도우를 장식하며 화제를 몰고 온다 (B여사가 또 전 컬렉션을 구입했다). 1994년 그는 정식으로 런던 패션 위크에 데뷔하고, 독특하고 실험적인 소재와 실루엣을 선보이며 아방가르드 디자인 대열에 합류한다.  1995년 센트럴 세인 마틴 졸업쇼에는 안토니오 베르라디가 등장하며 ‘제 2의 갈리아노’라는 기대를 한몸에 안고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이어간다. 

런던이 발굴한 디자이너의 파워는 막강해지고 있었다. 갈리아노는 지방시 (1995)를 거쳐 크리스챤 디올 하우스의 수장이 되었고 (1996) 파리의 꾸띄르 하우스를 책임진 첫 영국 디자이너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갈리아노가 떠난 지방시에는 알랙샌더 맥퀸이 들어섰고, 세계는 런던이 발굴한 디자이너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빅 하우스들은 크레이티브 디렉터 혹은 디자인 팀을 스카웃하기 위해 런던을 찾았다. 런던의 인큐베이터 역할이 빛에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1995년, 스텔라 맥카트니가 센트럴 세인 마틴 졸업 작품쇼에 그녀의 친구들인 나오미 켐벨과 케이트 모스를 세웠고, 아빠인 비틀즈 전 멤버 폴 맥카트니가 부른 노래 ‘스텔라 메이 데이 (Stella May Day)’가 캣워크 위에 울려 퍼졌다. 관중석에서는 영국의 영웅 폴 맥카트니가 부인 린다와 함께 딸의 졸업쇼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스텔라의 쇼는 대서특필 되었고, 두 시즌 후 그녀는 끌로에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스카웃되어간다. 칼 라가펠트의 뒤를 이은 파격적인 등용이었다. 

런던 패션 위크의 인기는 상승세를 타는 듯했다. 하지만, 영국 내 디자이너들을 육성할 빅 하우스의 부재와 투자자들의 소심한 지원으로 영국이 낳은 디자이너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 둘 런던 패션 위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TSE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뉴욕 패션 위크에서 활동하던 (1998-1999) 후세인 샬라얀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다 구사회생으로 자금줄을 잡아 2001년 파리로 거점을 옮겼다. 알렉샌더 맥퀸 브랜드를 재런칭한 맥퀸도 같은해 파리 캣워크에 데뷔 컬렉션을 선보였다. 

런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속속 거점을 옮기는 동안 디자이너들의 스카웃 행보는 줄을 이었다. 알랙샌더 맥퀸의 뒤를 이어 줄리안 맥도날드가 지방시를 맡았고 (2001-2004) 알랙샌더 맥퀸과 동기인 클레멘츠 리베이로가 이에 앞서 까샤렐 하우스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다 (2000-2007).  스텔라 맥카트니는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센트럴 세인 마틴을 막 졸업한 그녀의 친구 피비 필로 (1997)를 불러들였고, 피비는 스텔라가 떠난 끌로에의 크레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게 된다 (2001-2006). 엄마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며 끌로에를 떠난 피비는 공백기를 깨고, 올해 6월 셀린느의 크레이티브 디렉터직으로 귀환했다. 1996년 데뷔한 매튜 윌리엄슨은 뉴욕으로 쇼를 옮긴 후 (2002), 푸치의 크레이티브 디렉터 직을 맡게 된다 (2005-2008). 푸치에서 물러나 자신의 브랜드에 매진 중인 매튜 윌리엄슨은 이번 시즌 런던 패션 위크에 정식으로 귀환했다. 

 

WHAT'S HAPPENING NOW

어떤가. 런던은 정말 대단한 인재들을 배출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빅 디자이너들의 성공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런던 패션 위크는 몇해전부터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성공한 디자이너’들은 몸은 런던에 있지만, 브랜드, 모기업, 투자자 등이 브리티쉬가 아닌 관계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런던 패션 위크를 지지할 망정 큰 힘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런던 패션 위크 소속이 될 수 없으니까. 2000년 이후 템펄리, 피터 옌슨, 옌스 라우게센, 조나단 선더스에 이어 자일즈, 록산다 일린칙, 가레스 퓨 등 재능 넘치는 디자이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누구 하나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성공적인 브랜드로 자일즈와 루엘라, 그리고 템펄리 정도를 꼽을 수 있겠지만, 자일즈는 프랑스의 빅 그룹이 투자자라는 소문이고, 템펄리는 뉴욕으로 옮겨갔으면 루엘라는 이번 11월 비즈니스를  접었다. 

그럼, 영국의 빅 브랜드는 어떤가? 영국에는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이끄는 버버리 (버버리 포르섬 라인은 1998년에 런칭하여 2000년 런던 패션 위크에 데뷔했고, 2001년 밀라노로 옮겨갔다)와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이끄는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 (2001년 런칭된 기성복 컬렉션은 줄곧 밀라노 캣워크에 섰으며, 올해 런던으로 귀환했다 )가 있다.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가 홍콩 오너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어쨋든 역사와 전통 그리고 자본력을 지닌 기업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두 브랜드가 런던 패션 위크에 계속 남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런던을 지키고 있는 브랜드로 폴 스미스와 멀버리가 있지만, 폴 스미스는 본인이 디자인을 총지휘하고 있어 인재 등용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멀버리는 아직 성공적인 기성복 컬렉션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다. 

스윙 런던과 함께 전성기를 보낸 비바가 벨라 프로이드를 등용하며 재기를 노렸고, 역시 같은 시대를 아우른 오지 클락 또한 부활되었지만 두 브랜드 모두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이다.  그렇다할 흑자 매출을 올리지 못해 결국 투자자들이 자본을 회수하거나 비즈니스를 접었다. 

이제 드디어 본론이다. 런던이 낳은 신인 디자이너들의 능력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바이다. 런던에는 완벽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패션 컬리지들과 디자이너들을 양육할 전문 인력 (바이어, 에디터, 스카웃, 멘토 등)이 잘 구성되어있다. 이들이 패널이 되어 선정한 뉴제네레이션 어워즈의 주역들은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런던 패션 위크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키워낼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이너 브랜드의 육성이라는 것이다. 영국에는 프랑스의 LVMH나 PPR  그룹이 될 수 있는 기업이 없다. 아니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빅 브랜드에게 기대를 거느니 디자이너 브랜드를 키워주는게 맞다. 

영국 패션 협회가 런던 패션 위크의 25주년을 축하한 속사정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협회가 제안한 향후 25주년 프로젝트는 재정적인 지원 (패션 포워드, 디자이너 패션 펀드 등)과 경영적인 지원 (영국 영 패션 사업가 프로그램)을 활성화한다는 안이다. 여기에 패션 컬리지 졸업 작품쇼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도 추가 되었다 (컬리지 카운슬, 프링글 디자인 대전). 

그러니까 ‘B여사가 졸업 작품 컬렉션을 모두 구입’하고 ‘PPR그룹이 자본을 투자’해서 디자이너를 키웠던 그일을 ‘영국 패션 협회’가 나서서 해보겠다는 포부인 것이다. 사실 25년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신인 디자이너를 배출하자는 취지가 최선의 선택이었고, 런던은 그 일을 정말 잘 해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지속될 수 없기에, 이제는 방향을 살짝 돌려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서야 한다. 

지금의 디자이너 세대를 보면 승산이 다분하다. 크리스토퍼 케인이 베르사체 브랜드의 디자인 컨설턴트이고 베르수스 라인을 디자인하고 있지만, 그의 브랜드는 탄탄하다. 무리수를 두고 크게 확장하기 보다는 천천히 단계를 밟아 성장하고 있다. 오히려 베르사체가 케인의 도움으로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 듯 보인다. 마리오 슈왑은 자신의 브랜드가 홀스톤과는 다르다고 못 박으며 (마리오 슈왑은 2010년 홀스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뉴욕에 데뷔한다) 두 브랜드의 충돌이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무엇보다 런던의 뉴제네레이션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 기발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해를 거듭해 성장하고 있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아무것도 예측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꿈 꿔 볼 수는 있지 않은가. 패션의 역사 속 런던이 어떤 도시로 남을지는 25년 후에 다시 논하게 되겠지. 그것이 런던 패션 위크 25주년 플랫카드의 숨은 의미인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패션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런던에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으니까! 

글/ 여인해
사진/ Press Association Images
이 글은 Harper's Bazaar Korea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